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막 14:50-52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시 101:2-3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이다. 누구도 스스로를 장담할 수 없다. ‘지척이 구만리’라고, 가까이 살면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가까운 사람이 더 먼 사람으로 느껴지는 데는 별 수 없다. 눈앞에 닿을 것 같아도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것이 또한 인생인 것과 같다. 베드로가 장담하였다.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31).” 앞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0).” 하신 데 따른 단호한 각오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잡히실 때,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0).” 그 중에 저도 있었다.
그리고는 멀찍이서 살피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54).” 하필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66-68).” 그렇게 연거푸 자신을 알아보자,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71).” 마치 나 자신은 아닐까? 우리는 누구라도 그럴 것이어서 오늘 말씀 가운데 마가복음에만 있는 한 대목의 짧은 이야기는 슬프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51-52).” 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으나 어쩌면 마가 스스로 자신을 지칭하는 내용은 아닐까? 이 독특한 구절은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 버렸다는 내용 뒤에 붙어 있다. 보아하니 잠을 자다 예수께서 잡히신 것을 보고 도망치다, 벗은 몸을 두르고 있던 홑이불까지 팽개치고 도망가 버렸다. 짐작컨대 이 복음을 쓰고 있는 마가 자신일 것이고, 오늘 우리가 묵상할 때 우리 자신일 것이라 인정하게 한다. 나 역시 그럴 게 뻔하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란 셈이라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며 자랐는데, 늘 가까이서 목사님을 위하던 사람이 어떤 어려운 일로 교회가 위기에 처하거나 목회자가 궁지에 몰릴 때면 제일 먼저 돌을 던지는 것을 자주 봤다.
건축을 하고 칠 년 넘도록 부채에 시달리면서 우수수 떠나가는 교인들도 보았다. 절대 그럴 것 같지 않던 사람부터 교회를 떠나기 시작하는데, 결국은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도 늘 교회에서 국수를 삼거나 저녁에 올라와 기도하다 잠들던 집사님 내외와 한둘 정도…. 더 어릴 때 가끔 새벽예배도 나가고 금요예배도 참석하던 적이 있는데, 어린 나는 누가 졸거나 기도시간에 다른 짓을 하는 것을 보면서 뭐라 안 좋은 생각이 들었었나보다. 어린 게 식탁에서 아버지께 이르기를 아무개 장로님이 졸더라, 누군 아예 엎드려 자더라 하며 일렀다. 그때 아버지는 무심히 듣다말고 너도 그냥 자지 그랬니? 하고 달리 말이 없었다. 그게 어린 나이에도 무안했던 기억이 난다. 누구보다 앞서고, 장담하고, 절대 그럴 리 없다던 베드로를 위시하여 제자들이 모두 도망쳤다. 저들은 앞서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29, 31).”
그런 거 보면 다 그런 것이다. 스스로는 어쩔 수 없다. 그러면서도 ‘옥합을 깨뜨려 예수께 바치는 여인’을 향해,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5).” 이렇듯 그럴듯하게 비판하며 주장도 하는 게 우리들이다. 우리가 주님께 옥합을 깨뜨려 부어드리는 일이란 자신을 쏟는 일이다. 남이 하면 고깝고, 자신이 하면 의롭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주를 사랑한다는 일은 이와 같이 옥합을 깨뜨려서 붓는 일이다. 이를 두고 허비하는 것이라 판단하던 이들이 오늘 이처럼 발가벗고 도망치는 꼴을 보일 줄이야, 스스로는 알았겠나? 우리가 주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사는 일이다. 어떠하든지 주께 아뢰는 것이다. 인생에 가장 비극적이었던 인물을 꼽으라면 욥일 텐데,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러한 고백이 주의 영광이 되는 찬송이다.
우선 이 여인이 향유를 허비한다고 말한 것은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사 32:5-7).” 이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태생이 그러하다. 어리석어서 어리석은 말을 하는 것이고, 마음이 불의함으로 패역을 말하는 것일 테니,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다.’ 저마다 자기주장을 하는 정치인들과 이를 동조하고 따르는 무리들의 경우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8).”
곧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하고, 사람이 본래 그렇다 해도, 오늘 이 여인의 행함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 14:8).” 하심으로 그 의미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고 계신다. 곧 이 여인을 비난하는 자들을 꾸짖으시며 ‘그 행동을 아름다운 것’이라 변호하시는 것이다. 이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의 존귀는 예수의 대언으로 주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 감히 말하지만 예수님의 이와 같은 증언으로 공의의 심판은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신다.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증거가 됨이다.
곧 호언장담하며 더러는 으스대며 예수를 따랐을 제자들은 잡히시던 자리에서 도망쳤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그의 메시야로서의 환영받지 못함에 대해 이미 말씀하신 바 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10:33).” 하는 데서 저들은 설마, 했던 것일까? 그 뒤의 말씀은 귀담아 들을 수 없었던 것인지도,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34).” 결국은 ‘죽일 것이나…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셨는데, 우리는 저마다 당장의 문제에 쫓겨 감추고 있던 홑이불마저 벗어버리고 도망치는 게 실상이다.
아이 문제로 늘 힘들어하던 이가 한때는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내게도 기도를 부탁하곤 하였는데… 아이가 외대에 입학하고, 아랍어를 전공하고 카이로 대학 교환 학생으로 다녀오더니, 얼마 뒤 찾아왔는데 이슬람교도가 됐다고 했다. 실제 이태원 사원에서 여러 종교 교육을 받은 뒤에 그리 결정한 것이다. 아이의 말로는 그 뒤로 이상할 정도로 일이 잘 풀린다고 했다.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렇듯 종교를 바꾸고 난 뒤 무슨 문제가 해결됐고, 자신은 또 뜻하지 않게 모 장교로 복무하게 되었으며 그 일을 계기로 유명한 기관에 취업도 이미 보장된 상태라며, 그게 다 선생님 기도 덕분이라며 감사하다고 했다. 어찌나 자랑스럽게 좋아하던지, 뭐라 말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같은 신을 섬기는 것이라며 한참을 떠들다 간 적이 있다. 얼마 후 아이엄마와 통화를 했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 문제로 상심이 크시겠다고 위로하려 했는데 오히려 저 역시 감사하다는 것이다. 아이가 잘 되고 행복하면 그것으로 됐다고 하니 더는 뭐라 말할 게 없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부활 신앙이 없다면 십자가의 신앙은 일시적인 참회나 반성으로 그칠 뿐이다. 더 낳은 삶을 위해, 인생에 있어 종교 하나쯤 가지고 살며 마음에 위안을 삼으면 됐다는 것인데…. 당장의 일도 어찌 알겠는가? 그런 가운데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미리 기름 부은 이 사건과 제자들의 반응은 이어지는 내용으로 그 의미가 확대된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하심 같이 우리는 그 너머 부활을 생각하고, 죽음에 대한 예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는 오래 슬퍼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곁에 같이 있는 것 같은 것도 그렇고, 곧이어 우리가 함께 할 나라를 소망하고 상상하기도 하여서 그런지도. 어머니와 아침마다 통화할 때면 하루도 빠짐없이 이런저런 이야기 가운데 아버지 이야기가 같이 나온다. 그럼 우린 어떤 그리움으로가 아니라 앞으로의 소망으로, 슬픔보다 기쁨을 느낀다.
이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9).” 하심보다 영광된 축복이 또 있을까? 복음이 전파될 때 이 여인의 이야기도 같이 전하여질 것이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일’과 같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죽은 뒤에도 살아서 역사하는 성경의 영웅들이나, 우리 곁의 믿음의 사람들이나, 나에게 있어 부친의 삶이나 모두가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그리하여,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6, 39-40).”
하여 성경은 일일이 저의 생을 기록하였다. 저들의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어서이다. 이 여인은 향유 옥합을 드림으로 복음과 함께 전하여지는 복음의 일부가 되었다. 이를 보면서 뭐라 말하기란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 6:1-2).” 허투루 가벼이 말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누구라도 아니 그럴 것이라, 장담하는 그 자체로 허위다. 베드로의 말이나 제자들 모두가 그렇듯 자기 말에 자신들이 잡히게 된 셈이다. 그러므로 말에 있어 조심하길,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5).” 행여 누구의 어떤 일이나, 심지어 스스로 진리라 여겨 남을 뭐라 하기 전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그러다 이 꼴이 우습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51-52).” 이를 마가로 보면 나는 저의 이 글쓰기에서 이처럼 정직하고 아름다운 고백은 또 없다는 생각도 한다. 주 앞에서 스스로의 치부나 수치조차 가감 없이 드러내어 아뢸 수 있다면,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1-3).
우리는 누구나 가룟 유다도 베드로도 될 수 있어서 예수를 팔거나, 모른다고 부인하거나, 또는 홑이불마저 벗어던지고 벗은 몸으로 도망치거나 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유다는 스스로 해결하여 목을 맸고, 베드로는 슬피 울며 주 앞에 목이 멨다. 그런가 하면 마가는 숨겨도 될 부끄러움이나 드러내어 우리의 됨됨이는 어떠한가를 진술하였다. 오늘도 주 앞에 앉아,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101:1).
나의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주 앞에 아룀으로,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2-3).
그리하여,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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