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현. 2026. 7. 17. 05:52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눅 1:36-38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시 104:33-34

 

 

누가는 이 복음을 데오빌로에게 보낸다. 데오빌로가 높은 직위의 사람이었으나, 그를 자기의 후원자로서가 아니라, 복음을 배우고 지켜야 할 성도로 전한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3-4).”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많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예수에 관한 산 자들의 체험과 증거들을 보호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누가는 이 복음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우리’와 접촉하였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1).”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한다고 하면서 적잖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니 사건을 임의로 축소하거나 확대 재생산하기도 하여, 특정 종파의 교리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성경을 왜곡하여 새로운 기사를 꾸며내고, 그런 가운데 객관성과 정확성이 매우 부족하여 ‘외경’으로 읽히는 글도 늘어났다. 이러한 저서들이 정경에 들지 못하는 것은 예수에 관한 지식을 인위적으로 가미하였기 때문이다. 개연성이 없고, 어떤 의도가 다분한 전개로 ‘이야기’를 짓는 것에 주의해야 했다.

 

누가는 여기서 <우리>라고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예수에 관한 기록에서 객관성과 정확성과 역사성을 뒷받침해 주는 예수의 목격자들을 구분하려 하였다. 그것은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2).” 그러므로 <우리>는 명백히 그리스도의 증인들임이다. 하여 저들은 ‘이루어진 사실’에 충실하였다. 이 단어는 ‘충만한’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에서 ‘가져오다’ 하는 뜻을 가진 것으로 이미 성사된 일, 성취된 일을 뜻한다. 또한 ‘가장 확실하게 인정되고 믿어진 일’ 등으로 해석한다. 이를 종합하면 ‘벌써부터 예정되었던 계획을 따라 성취된 확실한 사건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출생과 생활과 그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리고 예수의 생애를 통해 ‘제자들이 직접 체험하여 믿게 된 사실들’이라는 것으로서 이 누가복음이 정확한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기록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누가는 누구보다 각 사건과 상황에 있어 사료(史料)들과 정확한 날짜를 비교적 소상히 언급하여 역사가로서 면모를 다했다. 이에 <말씀의>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약에서 ‘말씀’ 곧 ‘로고스’는 다양하고 빈번하게 사용 된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말씀-예수’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표현하는 데 있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할 때, ‘말씀(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분명 말씀이 성육신보다 선재(先在)했음을 암시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바로 이 말씀으로,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그 말씀은 생명이고, 사람들의 빛이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시다. 하나님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14). 이에 오늘 본문의 말씀은 ‘복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보인 모든 계시가 복음이다. 그런 점에서 요한과 달리 누가는 예수의 공생애 내내 곁에서 목격자 되고 일꾼 되었던 제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복음서 기록을 위해 그 같은 사도적 증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본문은 바로 이 같은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목격자는 ‘스스로 본 자’, ‘직접 자기 자신이 본 자’를 뜻한다.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눅 1:2).” 나는 이 부분에서 새삼 놀라운 묵상을 하는 것은 우리도 이에 해당하는 자들로, 저보다 더 시대적인 차이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목격하는 바는 동일하다는 것에서다. 곧 우리를 성도라 하심은 하나의 경험, 곧 주가 함께 하심을 직간접적인 체험으로 가진 사람들이다. 더러는 이를 모르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린 모두 우리 안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목격하고 체험하고 이를 함께 한 기억들이 있다. 어떤 이는 어머니의 낡은 성경책에서도 이를 확신한다. 죽었다 살았다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나 같은 경우 남다른 유년과 성장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내 믿음의 바탕이 된다.

 

일찍이 아버지의 사업이 물에 잠겨 떠내려가는 대홍수 사건을 나는 조모의 등에 업혀 천호동 다리 위에서 보았다. 그때가 네다섯 살 정도였을까? 할머니는 다급한 중에 장손인 나를 먼저 들춰 업고 다리 위로 피신했다. 기억이 닿은 지점에는 시뻘건 황톳물이 무섭게 흐르고 삽시간에 동네를 삼키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부친의 공장들과 집과 모든 일가(一家)의 성과들이 속수무책으로 힘없이 쓸려 떠내려갔다. 이후의 기억들은 어렴풋한데 그때 그 현장은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여러 개척교회로 전전긍긍하며 모진 가난 속에서 뒤늦은 신학과 목회는 거의 죽고 살기로 이뤄지는 전투였다. 그에 따른 희생물이라면 우리 사남매의 성장일 것이다. 특히 막냇동생은 포대기에 싸여 열병을 앓고 죽을 거였는데, 그럼에도 나의 부모는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들의 사역으로 투입되었다. 그때 동생은 만일 집회 중에 죽으면 산에 묻고 올 생각으로 그 집회에도 데려갔던 것이다.

 

우린 모두 어렸고, 모진 가난과 궁박함은 예외가 아니었다. 한 겨울에만 조모까지 포함하여 일곱 식구가 한 방에서 잤고, 대부분은 방이 없어서 교회나 교회 마당에서 기거하다시피 했다. 세든 교회 옥상의 가건물은 그나마 형편이 나았던 것이고, 어디 지하 단칸방인데도 아이가 넷이라는 이유로 쫓겨나기 일쑤였고, 얼마동안 중간에 둘 나와 내 밑의 동생은 가까운 거리의 친척 집에 맡겨지기도 했다. 나환자촌에서의 ‘그 이상한 몰골의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낸 것은 앞서 그 모든 가난과 궁벽한 살림이 가져다 준 구력이라 하겠다. 살면서 실제 한센병 환자를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심지어 저들과 겸상을 하고 같은 공간에서 예배하며 그 마을에 속해 산다는 일은 여러 희귀한 기억들을 남겼다. 그러한 연단과 인내가 우리 형제들을 모두 주의 길로 가게 한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섭리라는 것을 이제는 확신하고 이 특별한 기억들을 사랑한다. 곧 오늘 본문의 이 ‘목격자’들은 그야말로 저마다 말씀 전하는 자들로 쓰임 받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여 이 ‘말씀의 일꾼’이라 번역하는 것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가 되고 일꾼 된 자들, 예수의 열 두 제자 외에도 70인의 전도대와 늘 예수를 수종 들던 여인들 있다.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막 15:41).” 그리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까지…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자신의 복음의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 기술을 가능케 한 자들이 ‘목격자’ 또는 ‘말씀의 일꾼’이라 하여,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양자 모두가 포함되고 있음을 밝힌다. 이는 이 글을 객관성을 확립한다. 복음의 권위와 내용상의 완벽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이라는 사실, 이들은 복음의 산 증인들임을 분명히 한다.

 

이를 나는 우리 모든 믿음의 성도들에게 있어 공통된 내용이라 확신한다. 가령 내 곁의 ‘믿음의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같이 공감하다 울고 웃는 주의 풍성하심이 있다. 그것이 죽었다 살아나는 기적에서부터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의 남다른 체험들에 이르기까지, 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감할 수 없는 확실한 체험을 공감할 수 있다. 그런 거 보면 믿는다고 하면서 저마다 바라보고 중히 여기는 시각이 다르다. 가까운 이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함께 어울려 성도의 교제도 활발한데, 공감하는 바가 적거나 일시적이다. 그냥 사회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 정도로일 뿐, 누가 가슴을 열고 자신의 간증을 말할 때 별로 호응할 수가 없다. 오히려 민망하고 면구스럽다. ‘전하여 준 그대로’ 믿기에는 미심쩍은 데가 있는 것 같이 자신은 그런 게 공감이 안 된다고 하소연한다. 의외로 많다. 그냥 좋은 사람들, 단체, 종교활동 정도에서 만족하는 ‘유한마담’들의 사교모임도 수두룩하다. 심지어 내가 아는 누구는 의도적으로 그 지역 가장 큰 교회를 다니며 유대관계를 쌓는다. 저는 그 지역에서 규모 있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에,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41-44).” 하는 어떤 경험. 전에 아버지가 미국에서 목회하시다 들어오시고 얼마동안 우리 집에 기거하실 때, 미국에서 한 가정이 놀러와 며칠을 묵은 적이 있다. 그때 아무개 권사였나? 하는 그 이가 나를 보며 인사하다, 자기 안에 알 수 없이 넘치는 기쁨이 느껴진다고 했고, 자기 안의 성령이 기뻐하신다고 하며 유난을 떨었던 기억도 있다. 그런 것처럼 누구와의 만남이 또는 저의 어떤 사연이 남다른 것으로 여겨져 놀라울 때도 있다.

 

그런 것 같이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30-31).” 이 느닷없는 소식,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24-25).” 때론 이해할 수 없고 두려울 정도로 놀랍기도 한… 우리가 성도로, 주의 자녀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산다는 일은 남다른 경험이 같이 간다. 이를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어린아이 같은 경우는 있을지언정 ‘그런 일이 없는’ 무체험의 성도는 있을 수 없다. 이에 오늘 누가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3-4).”

 

여기서 데오빌로 각하는 누가가 기록한 두 책(사도행전까지) 그 수신자로 데오빌로 각하를 대상으로 한다. 저가 누구인지 전하는 바가 별로 없다. 혹자는 이를 가명으로 하였다고 하고, 상징적인 인물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저는 도미티안 황제의 조카로 상속인이었던 클레멘스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게 되면 이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가명이 되고, 그의 이름에 ‘각하’라 호칭함으로 그가 실재(實在)한 로마의 고위 공직자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데오스’ 곧 ‘하나님’과 ‘필레오’ 곧 사랑하다는 단어가 결합한 합성어이다.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또는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을 나타낸다. 당시에 흔히 사용 되던 이름으로 어떤 특정 개인을 가리키기보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 즉 신앙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앙하는 ‘한 성도’의 이름이라는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한다. 상징적 이름도 가명도 아닌, 데오빌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초보에 들어서 있던 자로 누가는 그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이 복음서를 전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4).” 곧 나는 이러한 해석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내 형제들, 내 곁의 함께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범세계적으로 누가의 이 복음서는 이방 세계, 특히 당시의 헬라주의에 깊이 물든 신앙인들에게 보내졌을 것이다. 이에 ‘각하’라는 호칭을 붙인 것은 ‘지존하신’, ‘가장 고상한’이란 뜻으로서 형식적이고 친근하게 인사하는 의미보다 존경을 표하며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직함을 붙인 것이다.

 

나 역시 누구와 통화할 때 가까운 친구일 때 더욱 아무개 집사님, 목사님, 하고 그 뒤의 호칭을 높여 부르는 것처럼. 물론 데오빌로는 로마제국 내의 행정 장관이었거나 어느 직할지의 총독 내지는 고위 관직에 있던 인물로 추정하는 것이 설득력 있다. 바울 서신에서도 그렇듯이 말이다.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행 23:26, 24:3).” 어쨌든,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시 104:1).

 

오늘도 주를 찬송함으로 주의 기쁨으로,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24).

 

모든 성도는 이를 인정함으로,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28-29).

 

생의 원리에서,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33-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