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하현. 2026. 7. 19. 05:46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 3:1-2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시 106:14-15

 

 

이제 장성하신 예수께서 인자로서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3년간의 공생애를 시작하고 계신다. 앞서 공생애를 위해 준비하신 사실을 서술하였다. 본문은 예수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언급하기에 앞서 이렇게 예수의 선구자 요한의 사역을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교회의 시작으로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했던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의 출현과 사역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점이 된다고 보았다. 즉 누가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함으로써 구약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시대를 새롭게 여는 요한의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연속 선상에서 이해한다.

 

이는 앞서(1:5-2:52) 세례 요한의 출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병행하여 교차시켜 소개한 것과 같다. 본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의 사역에 있어 역사적 배경과 회개의 선포,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세례 요한의 투옥으로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보듯 누가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서술함에 있어 다음 장에서부터 소개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복음에 역사적 객관성과 실재를 부여한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배경 등 정확하게 기록함으로 이 모든 이야기의 사실성을 높인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출현은 이미 구약에서 이사야의 선포로 시작되어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3-5).”

 

곧 그의 사역은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각성하고 회개하게 함으로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는 것과 그 메시야를 소개하고 중거 하는 것이다. 그의 사역은 메시야의 선구자로 말라기에 예언된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그의 외침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오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7-9절)에서 그는 행함을 동반한 참된 회개 없이 물세례만을 받는 것은 무익하다는 사실을 경고하며 더 늦기 전에 희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요한은 구원의 조건은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오직 내적인 것에 있음을 강조하고, 진정한 회개를 통한 삶의 변화를 촉구한다.

 

두 번째 부분(10-14절)은 누가만이 독특하게 기록하는 내용으로 구체적인 생활 윤리를 교훈하고 있다. 이 교훈은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가난하고 억눌린 자를 돕고 동정하며, 정직하게 살아갈 것을 권면하였다. 이것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에 대한 누가의 깊은 이해와 관심을 반영한다. 세 번째 부분(15-17절)은 세례 요한의 선포 중 가장 핵심적으로 그의 뒤에 오실 메시야를 소개하는 것이다. 자신은 단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일뿐이고, 메시야는 눈에 보이는 세례가 아니라 참된 세례를 주실 분으로 종말에 심판을 행하실 분임을 선포한다. 이렇게 하여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그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였다.

 

누가는 시기적으로 훨씬 뒤에 발생했던 사건인 세례 요한의 투옥 사건을 본문에 앞당겨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다음 단락에서 나오는 예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세례 요한의 사역이 마감되고 복음의 핵심이 세례 요한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옮겨지게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빈 들 같은 마음에 임한다는 것이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1-2).”

 

곧 세례 요한이 사역을 개시할 당시 로마와 유대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과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드디어 세례 요한에게 임한 사실을 보여준다. 로마는 초대 황제인 아구스도가 죽고 그의 양아들 디베료가 14년에 즉위하여 다스리고 있었다.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줄 자로 36년까지 유대를 다스린 인물이다. 안나스는 6년에 로마의 수리아 총독 구레뇨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눅 2:2). 가야바는 그의 조카이자 사위로 로마의 수리아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어 18년부터 36년 사이에 재직한다. 이 안나스와 가야바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중심 인물이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마 26:3).”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침묵을 깨시고 드디어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것도 빈들에 있는 요한에게서 말이다. 그 말씀은 로마 황제나 위대한 제사장에게 임한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대제사장들에게 임한 것도 아니다. 바로 여기, ‘빈들’에 있던 세례 요한에게 임한 것이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1:80).” 여기서 먼저 붙들게 되는 교훈이 빈들이다. ‘빈들 같은 마음’이다. 하나님으로만 가득하고 만족하게 되는 마음이다. 이는 마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곧 우리 심령의 가난함에 천국에 깃드는 것과 같다.

 

빈들은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빈 땅이다. 정치가들의 권모술수도 없고, 세상의 탐심도 없고, 어떤 분주함도 복잡함도 없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빈들 같은 마음’은 ‘가난한 마음’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로 “복이 있다” 하신 것과 연결된다. 곧 “천국이 저희 것이다.” 가끔은 나의 이 같은 생활, 이러한 마음이 감사하고 이를 추구하기도 한다. 때론 외롭고 고독하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 나는 빈들과 같은 마음으로 교회와 집으로 한정된 생활을 한다. 시쳇말로 주식도 모르고 노후생활이 어떻고 하는 데 따른 대비니 준비니 하며 어떤 모색도 하지 않는다. 마치 오늘만 있는 사람처럼 이 시간, 새벽에 깨워 교회로 나오는 것과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글로 쓰는 일로 하루가 시작하고 꽉 찬다. 더러는 사회성이 결여됐네, 책임감이 부족하네 하는 소릴 듣기도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그런 몸과 그런 형편에서 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설교원고를 다듬고, 묵상글을 쓰고, 누구의 사연을 듣고, 그 일로 마음이 얹힌 듯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의 일이란 ‘빈들’ 같다. 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 임한지라.” 하는 말씀으로 더욱 나는 단순하고 명료해진다.

 

빈들은 세례 요한의 거처였다(1:80). 빈들은 유대의 황무지를 가리킨다. 서쪽의 유대산지와 동쪽의 사해 그리고 요단 저지대 사이에 있는 기복이 심한 지형이다. 이 지형은 석회질로 이루어져 땅의 굴곡이 심하고 자갈과 암석 조각이 많다. 이곳은 광야 특유의 잡목들이 많고 독사들도 많다. 빈들은 그저 낭만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외람되지만 나는 늘 내 몸 하나로 씨름하며 산다. 어디가 아픈 것은 일이라, 불편한 정도이면 그래도 살만하다. 늘 아픈 곳 말고 느닷없이 아픈 육체의 어디를 어르면서 때로는 하루가 힘에 겹다. 어제도 아내와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의 말없음에 아내는 어디 아픈가? 힘든가? 하고 물어보다가 그만두었다. 늘 어디가 힘들고 아픈 것은 스스로에게도 지겨운 일이다. 여기 빈들도 북쪽으로 길게 뻗으면 요단강과 합류하게 된다. 빈들이란 유대인들에게 애굽을 탈출하여 방랑했던 장소를 연상하게 한다. 이스라엘은 빈들에서 새로 시작하였고, 애굽의 습성을 씻어야 했다.

 

광야는 종말과 연관된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이는 광야에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 2:14-15).” 이는 저마다의 빈들, 그 광야에서 말씀을 나타내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누구에게는 홀로 육신의 질병을 감내하며 씨름하는 것이고, 누구는 그 부모의 부채에 더해 부친의 또 다른 사고(?)로 돈에 짓눌리는 현장에서고, 누구는 주식으로 손실을 보는 것 이상의 부채로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마음 뺏김의 상태이다. 바로 그 광야, 빈들에서 하나님은 만나기를 원하신다. 말씀으로 임하신다. 역설적이게도 오늘 시편은 그러한 지경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도 오히려 그 영혼이 쇠락하는 것에 탄식하였다.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시 106:14-15).

 

다들 저마다의 어려움과 고통을 두고 기도한다. 필사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받기 원하며 간구한다. 그러한 간구가 응답될 때 이상하게도 저들 영혼은 오히려 쇠약해졌다! 즉 문제 해결만이 그 마음의 중심이라, 설령 이것이 해결되고 풀린 뒤에 오히려 저들은 주 앞에서 멀어진다. 가령 죽을 뻔한 상황에서 주의 도우심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더러는 우연으로, 가벼이 여겨 ‘다들 그러고 사는 일’로 치부한다. 하여 바울은 자신도 낫고자 하여 세 번 기도하였지만 응답받지 못한 것으로 오히려 감사하였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8-9).”

 

나는 이를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오늘에 이르러는 순응함으로 하루씩 산다. 가령 일어났을 때 억, 하고 오늘은 어디가 아프다. 연통이 돌아간 것처럼 옆구리를 중심으로 몸의 중심이 안 맞는 것 같고, 아프다. 살살 움직여 세수를 하고 교회로 온다. 억, 하고 오늘은 어깨가 아프면서 팔을 못 쓰겠다. 살살 움직여 세수를 하고 교회로 와서 그 손으로 묵상글을 쓴다. 억, 하고 며칠째 엄지발가락 발톱 끝이 퉁퉁 부어서 딛지를 못하겠다. 내성 발톱으로 가끔씩 겪는 일이면서 때론 이처럼 고통이 심하다. 그 외에 늘 아픈 곳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민망하다. 그렇듯 나의 빈들에서 나는 말씀을 듣는다. 헉, 하고 이유 없이 물에 잠기듯 가슴이 조여 오는 불안으로 안정제를 삼킬 때도… 그러니 일일이 열거할수록 한숨만 나오는데, 그와 같은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신다.

 

내게 말하여진 말씀으로 나는 묵상하고 글을 쓰고 설교원고로 다듬고, 누굴 생각하고 어떤 일에 놓이고 씨름하고 혼자 별 거 아닌 일 같은 데서 쩔쩔맨다. 바로 그 나의 활동이 빈들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역을 시작하게도 하지만 사역을 끝마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모든 것의 끝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 어제는 점심께 결국 타이어를 교체하러 갔다. 요즘은 랜탈 시스템이 있어서 3년간 저들의 관리를 받으면서 돈을 나누어서 낸다. 서류를 작성하고 계약하는데, 안내하는 이가 트랜스젠더였다. 예쁘게 꾸몄으나 목소리며 목젖, 손의 형태나 몸가짐이 한 눈에 봐도 그러했다. 그런가보다 하며 나는 저를 위해 잠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빈들은 늘 사사로운 듯하나 별의 별 일들이 다 일어난다. 그런 가운데 말씀이 임한다. 이에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삼하 22:27).” 빈들에서는 더 멀리까지 볼 수 있다. 굳이 막힌 게 없다. 복잡할 것도 없다. 늘 이는 바람과 위험들은 오히려 안전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안다. 저가 ‘복이 있나니’ 그와 같은 복은 하나님으로만 구하게 된다. 할 때 이미 ‘천국이 저의 것임이다.’ 곧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청하라(행 10:2-5).” 주가 예비하신 말씀과 주의 종이 준비하고 있다. 곧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오늘은 이와 같이 복잡한 정세 속의 빈들에서,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06:1-3).

 

하여 깨닫기를,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14-15).

 

부디 이를 알고 깨달아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47-4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