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스크랩] 우물

전봉석 2006. 8. 6. 18:32

우물.1



마을 초입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다. 한여름
정오에는 한 뼘의 그늘조차 내주지 않는, 인색하고
옹졸한 나무였다. 그러나 늘 그 마을을 떠올릴 때면,
그 나무 아래에 서 있곤 하던 기억이 먼저다.


아이들이 그리로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고
보면,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지루하지 않는 땅거미에
젖곤 하였다. 하나씩 하나씩 그림자를 벗고 있는 사
물들의 풍경은 고단한 하루의 수고에서 풀려나 자연
스럽게 몸을 뒤치락대느라 부산했다.

소녀는 우물 속을 들여다 보며 흥얼거리곤 하였다.
그런 소녀를 먼발치에서 종종 훔쳐보며 처음에는 우
물 아래, 누군가와 도란도란 말을 나누고 있는 것으
로 여겼다. 누가 우물 속에 들어간 것일까!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소녀는 정신이상자
라는 것, 삼막 아래 개울가 근처에 산다는 것 정도
를 알게 되었다. 좀더 확연하게 그 소녀를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하교길에서이다. 너댓 녀석의 쪼무래
기들이 한 손에 나뭇가지 하나씩을 움켜쥐고 무언가
를 연신 쑤셔대고 있는 걸 보았다. 웅성대며 서 있
는 아이들의 틈바구니를 헤치고 들어서자 순간 나는
나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녀석들은 소녀
의 가랑이 사이로 나뭇가지를 우겨넣고 있었던 거였
다.
그러나 그 소녀는 헤죽거리며 웃고만 있을 뿐, 뭐
라 반항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길섶에서
돌을 하나 주워들어 길길이 날뛰며 녀석들에게 덤벼
들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돌연 나의 엉뚱한 기세
에 눌려 녀석들은 욕을 해대며 도망갔고, 그제서야
소녀는 걷어올린 치마를 추스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그 소녀
를 흉내내곤 하였다.
우물 속 그 무색계의 심연으로 말을 건네기도 하
고, 한 줌의 모래를 주워다 흩뿌리며, 차르르차르르
물 면에 닿는 소리에 귀기울이곤 하였다.


재 너머 멱감으러 간다는 말을 엿듣고는 짐짓 수
업이 끝나기도 전부터 조바심 쳤다. 오늘은 기필코
따라가야지,하는 생각으로 이를 앙물고 있는데 짝꿍
계집아이가 난처한 부탁을 했다. 교실 마룻바닥 아
래로 새연필이 떨어졌으니 좀 꺼내달라는 거였다.
한 달에 두번 짝을 바꿀 때면, 반 사내 녀석들은
모두 이 계집아이와 짝을 하려고 은근슬쩍 안달이다.
복도에 나가 줄을 서고 남자가 먼저 한 분단씩 앉아
자리를 메우면 뒤이어 계집아이들이 들어와 옆에 앉
곤 하는 것으로 짝을 바꾸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사
내 녀석들은 너나 없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안달복달
이었다. 방금 말한, 내 짝꿍 계집아이와 서로 짝이
되고 싶어 안달인가 하면, 코흘리개 무당집 딸내미
와는 짝이되지 않으려고 복달인 셈이었다. 그러니까,
매번 코흘리개만 당번이다시피 한 내가 이 웬 횡재
람? 이 계집아이가 먼저 남은 두 자리를 건너뛰고는
내 옆으로 와 앉았으니, 오죽이나 밉살스러웠을까!
청소 당번들만 어수선한 교실에서 나는 그 계집아
이와 함께 교실 바닥을 후비고 있었다. 벌어진 마룻
바닥 틈새로 좀처럼 잡힐 것 같으면서도, 닿으면 밀
려나는 통에 정신이 다 아찔할 지경이었는데, 그 계
집아이는 한 술 더 떠서 나더러 마룻바닥 밑으로 들
어가라는 거였다. 교실 밖 창문 아래로 난 쥐구멍을
언제 봐 두었는지 차라리 그리로 들어가서 꺼내달라
는 거였다.
당연히 석연찮긴 했으나 이제와서 어쩔 도리도 없
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같이 들어가야 한다는 말
은 차마 못하고, 고작 한다는 말이 너 여기 꼼짝 말
고 있어라, 꼬옥. 재차 다짐하고는 주춤거리다 마룻
바닥 밑으로 기어들었다.


우물 속 까마득한 저 아래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어둠은 마치 땅거미가 거둬들인 그림자들을 쌓아 놓
은 창고같다. 야-아-, 야-아-아-. 차르르-, 차르르-.
메아리 쳐 되돌아오는 또 다른 나. 소녀는 자기
안의 '나'와 얘길 나누곤 하였던 것일까?

푸석대는 먼지 통에 연신 재채기를 해대고, 그럴
때면 너풀대며 일렬로 줄짓고 일어서는 먼지 때문에
눈물이 다 찔끔거렸다. 찾았어? 응? 있어? 계집아이
의 말이 마루 틈새로 줄져 서는 먼지들과 함께 헛돌
았다.

지우개, 칼, 삼각자, 몽당연필 ….
천하에 없는 것이 없었다.

야-아-!





우물.2



재 너머 멱감으러 가는 길에는 사탕수수밭이 있다.
이장네 것인데 좀처럼 인색한 사람이라 행여라도 수
수 한 줄기 뽑아 물라치면, 여간 눈치를 봐야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알싸한 맛은 달콤했다,는 표
현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지나는 길에는 워이- 워이- 소리를 지르는 게 미
덕이다. 수수밭은 물론이어니와 기껏 여물기 시작하
는 벼들 역시 참새떼의 극성으로 몸살을 앓다보니,
동네에서는 순번을 정해가며 꽹과리며 징을 들고 나
와 호들갑을 떨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짓도 동무가
있어야 신이나지, 혼자 걸음을 재촉하다 그러기에는
참으로 멋쩍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짝꿍 계집아이의 새연필은 물론 손에 잡히는 것을
모조리 움켜쥐고 나온 덕에 책보가 다 불룩하다. 짝
꿍애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뭐가 그리 재미난지
한참을 낄낄대며 웃어댔다. 그러면서 내 얼굴에 묻
은 먼지를 닦아주다 계면쩍게 웃는 모습이 고마웠다.
교실 마룻바닥 밑은 끝모를 심연 같았다. 턱턱 막
히는 숨이야 그렇다 치고 뿌옇게 앞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먼지구덩이 속에서 가늘게 펼쳐지던 빛줄기
의 요란한 꿈틀거림은 뭐라 형용하기에 어렵다. 신
비롭다고 해야 하나, 마치 수억 개의 문을 열고 들
어서는 끝도 없는 방(房)들이었다. 손에 닿을 듯 닿
다 부서지고, 열고 들어서면 삽시간에 사라지는 방.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그 애에게 내가 본 것을 설
명해 주고 싶었다. 그 황홀한 설레임에 대해.

하긴. 지난 달, 무당집 코흘리개가 지 엄마 손을
잡고 우리 집에 왔었던 걸 안다면 짝꿍애도 나란 놈
에게 정나미가 떨어질 게 뻔하다.

이상도 하지…그 코흘리개는 개 밥의 도토리 마냥
짝을 바꿀 때마다 이리 밀리고 저리 채이고, 그러다
는 결국 내 옆에 와 앉곤 하였다. 먼저 자리를 잡은
녀석들이 코흘리개가 옆에 와 앉을라 치면, 욕을 하
고 욱박지르는 통에 어쩔 도리없이 내 옆에 앉곤 하
는 거였다. 오죽하면 담임 선생도 번번이 코흘리개
더러 수돗가에 가 낯짝 좀 씻고 오라고 내쫓기 일쑤
였을까만. 그 애 몸에서는 진한 향냄새와 함께 송장
썩는 냄새-한 번도 맡아본 적 없지만 아이들이 그렇
게 말했다-가 났다. 거기다 연신 누런 코를 달고 살
았으니. 차마 나까지 다른 자리로 가라고 대놓고 면
박을 줄 수는 없던 것이, 나는 '예배당 코흘리개'였
다. 그렇다고 그 애처럼 진짜 코흘리개였다는 건 아
니다. 아이들이 나를 그렇게 놀렸던 건 서울에서 전
학온 서울뜨기인데다 그 잘난 전도사 아들로 예수쟁
이 아들이니까, 친구 녀석들의 따돌림은 그 애나 나
나 거반 다를 게 없었다.

어쨌든. 무당집 코흘리개 계집아이는 정말이지 냄
새가 너무 지독했다. 거기다 누런 코를 연신 훌쩍대
는 통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는 아이였다. 늘 그
런 건 아니었지만(사실이다. 지금까지도 미안한 마
음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면 연필로 그 애의
어깨를 쿡쿡 찌르며, 가 씻고 와라 응? 하며 수돗가
로 내몰곤 했다. 그러면 또 그 애는 넙쭉넙쭉 말은
잘 들었다. 기껏 가서 낯짝에 물칠만 하고 오는 게
고작이었지만 한동안 쉬는 시간이면 나는 그 애를
밖으로 내몰고는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당 뒤에 딸린 조그만 사택으
로 그 애가 지 엄마 손에 이끌려 찾아왔다. 그때만
해도 일 주일 내내 기숙사에 가 있던 아버지가 주말
에나 집에 와 다음 날 주일을 지키고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곤 하셨는데, 마침 아버지가 집에 와 있는 날
이었으니….
오죽했으면 무당이 예배당을 찾았겠나만, 것도 어
색한 터에, 무당 앞에 고개를 숙이고는 연신 사과를
해대는 전도사 꼴은 또 어떻고. 이유인즉, 그 애의
어깨에 피고름이 맺힌 거였다. 어쩌다 딸내미를 씻
기던 차에 어깨에 맺힌 피고름을 보고는 아니 놀랄
에미가 어디 있겠나. 그때까지만 해도 무슨 영문인
지 알지 못한 터라 문 밖에서 서성대며 눈치만 살피
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나를 방으로 불러들여서는 어
찌된 것이냐며 그나마 남은 자존심을 확인하려던 모
양이었다.
이런! 내 눈으로 직접 그 애의 피고름 맺힌 어깨
를 보는 순간 말문이 다 막혀버렸다. 내가 안 그랬
다는 게 아니라, 그 애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상
태에서 내 눈치만 보고 있었으니, 그렇게까지 됐을
줄이야….
몇 번을 연거푸 사과하는 것은 물론, 그러는 사이
어머니는 푸줏간에라도 뛰어갔다 오셨는지 신문지에
둘둘 말린 고깃근을 건네며 다시금 머리를 조아렸다.
일이 그쯤되자, 그 애가 지 엄마 손에 끌려 풀이
죽은 채 돌아간 뒤, 싸릿대문 채 뽑아 들고 들어온
아버지에게 나는 흠씬 두들겨 맞았다.

재 너머 뚝방에 다달았을 때는 이미 또래 녀석들
이 널어놓은 빤스가 꾸덕꾸덕 마른 뒤였다. 녀석들
은 나를 보자 씰룩대며 하나 둘씩 옷을 주워 입고는
집으로들 향했다. 녀석들의 따돌림에 어느 정도 익
숙해질 만도 한데, 순간 밀려드는 서운함에 나도 모
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녀석들이 돌아간 휑한 뚝방 밑에서 한참을 머뭇대
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뚝방으로 올라갔다. 어지간한 녀석이
아니고는 열 길은 족히 넘는 뚝방 위에서 뛰어내린
다는 게 어림도 없는 짓이었는데, 그래서 간혹 녀석
들은 그것으로 잰 척을 하며 겨루기를 하곤 하였는
데,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멀리,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예배당 종탑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힘껏 돋우
어 뛰어내렸다.

가끔 꿈꾸곤 하던, 우물 속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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